은행권이 같은 날 서로 다른 방향의 기술 계획을 내놨다. 신한은행은 3일 부동산 감정평가서 점검을 지원하는 AI 시스템을 금융권 처음으로 도입했다고 밝혔고, KB국민은행은 양자컴퓨팅 시대에 대비한 보안 기술 공동 연구 협약을 체결했다고 알렸다.

하나는 지금 당장의 업무 효율, 다른 하나는 아직 오지 않은 위협에 대한 대비다. 두 사안을 나란히 놓고 보면 은행들이 기술 투자를 어디에 나눠 담고 있는지가 드러난다.

당장의 효율: 사람이 최종 판단을 쥔 AI

신한은행이 도입한 '감정평가서 AI 점검 Agent'는 대규모언어모델과 로봇프로세스 자동화, 문서인식기술을 연계해 감정평가서의 주요 항목 간 정합성과 추가 확인이 필요한 사항을 분석한다. 은행 내부 측정 결과 건당 점검 시간은 기존 대비 약 70% 줄었고, 하루 처리량은 약 3배로 늘었다.

주목할 대목은 설계 방식이다. Agent가 내놓은 결과는 본부 담당 직원이 다시 확인하고, 최종 검토와 판단도 직원이 한다. 신한은행은 이를 두고 "담당자의 업무를 지원하기 위해 도입한 내부 업무 도구"라고 설명했다. 적용 범위도 집합건물부터 시작해 단계적으로 넓힌다.

대출 심사에 쓰이는 자료를 다루는 만큼, 속도보다 검증 절차를 앞에 둔 구성이다.

오지 않은 위협: HNDL이라는 개념

KB국민은행이 양자내성암호(PQC) 전문기업 키페어와 맺은 협약은 성격이 다르다. 당장의 효율이 아니라 암호 체계 자체가 무력화될 가능성에 대비하는 작업이다.

양측이 특히 언급한 것은 HNDL(Harvest Now, Decrypt Later) 공격이다. 지금 암호화된 데이터를 수집해 보관해 두었다가, 양자컴퓨터가 상용화된 뒤 해독하는 방식이다. 오늘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암호가 몇 년 뒤에는 안전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이 전제가 금융권에서 특히 무겁게 다뤄지는 이유는 데이터의 수명 때문이다. 계좌 정보나 거래 기록은 유출 시점보다 훨씬 뒤에도 가치를 가진다. 지금 새는 데이터가 나중에 읽히는 상황을 막으려면 대비를 미리 시작해야 한다는 논리다.

두 방향이 만나는 지점

두 사안은 겹치는 데가 없어 보이지만 공통점이 있다. 어느 쪽도 기술을 곧바로 전면에 적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신한은행은 집합건물부터 적용해 정확성과 안정성을 검증한 뒤 넓히기로 했고, KB국민은행은 상용 적용이 아니라 공동 연구와 실증사업 단계에서 출발한다.

금융권에서 새 기술이 도입되는 방식은 대체로 이런 모습을 띤다. 도입 발표가 곧 전면 적용을 뜻하지는 않는다. 관련 소식을 볼 때는 적용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사람의 판단이 어느 단계에 남아 있는지를 함께 확인하는 편이 실제 변화의 크기를 가늠하는 데 도움이 된다.